“놀랐어요? 난 잠이 든 줄 알았지요.”
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. 투스넬데는 그녀의 손을 빼냈지만 파울은 여
전히 그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. 그는 손을 빼내고 싶었으나 너무 당황해서 어떤
생각이나 결심을 할 수가 없었으며 손을 치우는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.
별안간 그는 질식당한 듯이 무서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.
투스넬데 양도 일어났다. 베르타는 제자리에서 깊숙이 머리를 숙인 채 흐느끼고
있었다.
“들어가세요. 우린 곧 따라 들어가지요.”
투스넬데가 파울에게 말했다. 그리고 파울이 갈 때 이렇게 덧붙이면서 말했다.
“머리가 아픈 모양이에요.”
“이리 와. 베르타야. 여긴 너무 덥다. 무더위에 질식할 것 같구나. 자, 정신
차려라! 집으로 들어가자.”
그녀는 조용하고 낮게 흐느끼며 울었다. 한참 후 몸을 일으켜 머리를 뒤로 쓸
어 넘기더니 천천히 그리고 기계적으로 웃기 시작했다. 파울은 평안을 찾지 못
했다. 왜 투스넬데는 그녀의 손을 자기의 손 위에 얹었을까? 그저 한낱 장난이
었을까? 혹시 그녀의 행동이 내게 얼마나 이상스런 아픔을 주었는지 알았을까?
다시 상상할 때마다 그는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. 그것은 수많은 신경과 핏줄
이 질식한 것 같은 경련, 머리에 오는 압박과 가벼운 현기증, 목에 오는 뜨거움,
또 맥박이 묶인 것처럼 마비된 불규칙적이며 요란스런 심장의 파동이었다. 그러
나 그렇게 괴로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.
그는 집을 지나 연못으로 뛰어갔으며 과수원 안을 왔다갔다 뛰어다녔다. 그러
는 사이에 무더움은 점점 더해갔다. 하늘은 온통 흐렸고 소나기가 올 것 같았다.
바람 한 점 없었고 가끔 가느다란 빗발이 나뭇가지 사이로 떨어졌다. 이 빗발로
투명하고 매끈하던 연못의 표면이 한 순간 흐트러져 은빛으로 떨렸다.
잔디 둑에 묶여 있는 조그만 낡은 배가 젊은이의 눈에 띄었다. 그는 배에 타
서 하나 남아 있는 노젖는 자리에 앉았다. 다른 노는 없어진 지 오래인 것 같았
다. 그는 연못에 손을 담가 보았는데 그 물은 기분 나쁘게 미적지근하였다.
이유 없는 슬픔이 그를 엄습하였으며 그 슬픔은 그에겐 아주 낯선 것이었다.
그는 짓눌리는 꿈을 꾸고 있는 듯 생각하였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지를 전연 꼼
짝할 수 없었다. 희미한 불빛, 어둡게 구름 덮인 하늘, 미지근하며 안개낀 연못,
노도 없이 바닥에 이끼 낀 낡은 나무배. 이 모든 것은 고양시퀵서비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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우울하고 슬프고 비참하
게 보였으며 어떤 무겁고 맥빠진 절망 앞에 굴복한 것 같았다. 그는 까닭없이
이 절망을 통감하고 있었다.
그는 집이 있는 곳으로부터 흐릿하고 나지막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오는 것을
들었다. 다른 사람들을 다 집안에 모아놓고 아빠가 그들 앞에서 연주하고 있을
지도 모른다.
파울은 단번에 그 곡목을 알았다. 그것은 `페르귄트`에 대한 그리그의 음악이
었다. 그는 집으로 얼른 가고 싶었다. 그러나 그는 그대로 머물러 앉아 느릿느릿
움직이는 물결을 넘어 지친 듯 움직이지 않는 과수들의 가지를 뚫고 잿빛 하늘
을 응시하고 있었다.
이 여름 들어서는 처음 오는 제격의 소나기가 곧 쏟아질 것 같은데도 그는 예
전처럼 소나기가 반갑지 않았다.
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그치고 한동안 아주 조용하였다. 한참 후에 자장가처럼
은은한 박자를 타고 부드러운 곡목 몇 가지가 연주되었는데 그것은 나직하나 들
어보지 못한 음악이었다. 그 다음에 노래 소리가 들렸는데 여자들의 목소리였다.
그는 그 노래를 몰랐지만 노래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. 그러나
그에게 그 목소리는 낯이 익은 소리였다. 가볍게 숨죽인 약간 맥없는 목소리의
주인공을 그는 알고 있었다. 그것은 투스넬데의 목소리가 아닌가! 그녀의 노래는
특별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나 그 노래는 그녀의 손이 주는 감촉과도 같이 가
슴을 죄며 고통스럽게 그의 마음을 때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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